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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리원의 서재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와 리바이스의 역사 California Gold Rush

by ghdzbql 2021.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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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aliforniaGoldRush.png

-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

 California Gold Rush 1848 ~ 1855 :

 

  1848년 01월 24일 새크라멘토

( 캘리포니아의 주도 )의 개척자 존 서터가

고용한 현장 감독이었던 제임스 W.마셜이

금을 발견하면서 발단이 됐다.

 

  서터는 스위스 포목 상인이었는데

1834년 빚쟁이들과 자신의 아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고,

 

  멕시코 정부로부터

새크라멘토 부근의 목축과 농업용

식민지를 받아 자신의 거주지로 삼았다.

 

  사실 셔터는 도규모 농업을

계획했기에 차질이 생길까 두려워

금 발견을 비밀에 부치려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의 바람과는 달리,

1848년 3월 샌프란시스코 신문사

사주로 있던 상인 새뮤얼 브래넌에 의해

 

  황금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자 무려 30만 명이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캘리포니아에서 최초로 금이 발견된 건

1842년이었는데, 당시에는 금광 발견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캘리포니아가 멕시코 영토인

알타 캘리포니아의 일부였는데,

 

  이제보니 기가막힌 타이밍이었던

1848년 2월 2일 미국-멕시코 전쟁이

끝나면서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에 의해

미합중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에 미국인들 뿐만 아니라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라틴아메리카, 유럽, 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에서까지 찾아왔다.

 

  12월 05일 제임스 포크 대통령의

금의 발견을 긍정하는 내용의 의회 연설로

시간이 지날수록 개인 채굴자보다

자금력을 가진 광산개발 회사의

참여가 늘어났다.

 

  그렇게 초기에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극소수에게는 막대한 부를 가져다 줬지만,

대다수는 건진 것 없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Gold Rush는 당시 개척지에 불과해

고스트타운으로 불리던 샌프란시스코를

신흥 도시로 성장시켰고

( 1,000명 -> 25,000명까지 증가 ),

 

  캘리포니아는 마을의 모습을 갖추게 되면서

법률 시스템, 정부 창설에 이어

미국의 31번 째 주가 될 수 있었다.

 

  어느 정도였는지 단적인 예로 보면

샌프란시스코의 부두와 도크에는

버려진 수백 척의 배가 감겨져 있었고,

 

  현지 기업가들은 이 배들을 창고, 술집,

호텔, 감옥으로도 사용했으며,

상당 수의 배들은 마을 건축물을 짓기 위한

토지 매립재로 쓰였다고 한다.

 

  이런 금과 은의 발견은 네바다, 콜로라도,

오리건, 몬태나, 다코타 주의 정착지에도

비슷한 영향을 주었다.

 

  1850년 이후로 금광이 거의 고갈되자

미국인들은 외국인들을 배제하기 시작했고,

 

  조상 대대로 터전을 일궈왔던

인디언들도  배척의 대상이 되어

학살되거나 타지로 내쫓겼으며,

무리한 금 채굴로 환경은 파괴되고 말았다.

 

  야나족은 백인들의 학살로 멸족된

부족 중 하나다.

 

  인디언들은 미국 역사에서

철저하게 무시되었는데,

인디언이 미국 대법원으로부터

'사람'으로  정의된 게 1879년이었다.

 

  또한 1852년까지 캘리포니아 현지에

존재하던 멕시코 광산법에 반해

미국에 귀속된 토지 권리로 제대로 된

법적 규제가 없었기 때문에 무법지대 속에서

많은 혼란을 낳았다고 한다.

 

  이후 미국 의회는 1872년 광산법을 제정해

최종적으로 관행을 법제화했다.

 

  미국 지질 조사국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첫 5년 간 금 1,200만 온스

( 약 370톤 )가 채취되었다고 한다.

 

[ 책 < 알고 있었니 > ]

https://1wndlf.tistory.com/55

 

 

 

 

- 리바이스 ( LEVI'S의 역사 ) :

  1853년 리바이 스트라우스

( Levi Strauss )가 설립한

미국 청바지의 원조 브랜드이다.

 

  창립자 리바이 스트라우스

( 1829 ~ 1902 )는 독일 바이에른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인 출신 사업가였다.

 

  독일에서 스트라우스 가족은 자신들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종교와 인종 차별을

경험했고, 스트라우스는 16살의 나이에

결핵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그는 어머니를 비롯한 두 자매와 함께

1847년 켄터키로 이민왔고,

 

  1853년 시민권을 취득한 뒤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로 번성하던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한다.

 

  스트라우스는 '리바이 스트라우스

앤드 컴퍼니 ( Levi Strauss & Co )'

가게를 창립해 가족들과 함께

각종 직물과 텐트를 팔기 시작했고,

 

  1871년 작업복 개념으로

청바지를 개발애 팔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청바지가 엄청난 인기를 끌자

1873년부터 청바지 특허를 내고

본격적으로 청바지에 주력한다.

 

  오늘날 "블루진"으로 알려진 청바지는

처음에는 무거운 캔버스와 함께 만들어졌으나,

 

  나중에는 얼룩을 숨기는

청색 데님제 직물로 바꿨다.

 

  조금씩 사업을 확장해나가던 그는

1890년대에 개발한 리바이스 501이

말 그대로 '대박'이나면서 미국 서부에서

알아주는 의류 브랜드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청바지는 주로

광부, 카우보이 같은 이들이 주로 입어

동부에서는 '경박한 서부놈들이나 입는 옷'

이라는 인식도 강했는데,

 

  1차 세계 대전 이후 서부에 온

동부인들에 의해 전파되면서

전국구로 나아가게 되었다.

 

 

  바닥부터 착실하게 다져온 만큼

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세계로 파병된 미국과

종전 후 1960 ~ 1970년대를 이끈 모드족 /

락 문화 / 히피 세대들에 의해 청바지는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옷이 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1983년 국제그룹 계열사인

조광무역에서 리바이스 브랜드를 도입해

라이센스 생산/판매했지만,

 

  국제그룹 해체 이후 1986년

서우산업에 인수, '한주통산'으로 사명을

변경했다가 1993년 리바이스

직판 체제로 들어섰다.

 

  리바이스 코리아는 엔지니어드 진과

타입원으로 이어지는 인기 라인업으로

국내 프리미엄 청바지 시장을 평정했다.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501 시리즈의

인기를 끌어올렸고, 여성 전용 브랜드인

'리바이스 레이디'도 별도로 선보였다.

 

  특히 레이디 전용 라인업으로 출시한

하트모양 포켓에 큐빅으로 갈매기 모양

스티치를 재현한 큐빅진이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았다.

 

  그렇게 2000년 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게스 ( Guess ), 캘빈 클라인 ( Calvinklein )

등과 같은 경쟁사들이 한국 시장용

라인업을 강화함과 동시에

 

  리바이스는 반대로 유행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인기 최절정

No.1에서 하락하기 시작했으나,

 

  미국에서는 10대 ~ 60대 전부를

아우르는 보편적 브랜드로 여전히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리비아 스트라우스는 1897년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28개의

장학금 기금을 마련했고,

 

  1902년 09월 26일 73세의 나이로

샌프란시스코 저택에서 사망했다.

 

[ 10년 후 부의 미래는? 제4의 물결 ]

https://1wndlf.tistory.com/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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